내가 생각하는 한국사회는 철저히 개인주의다.
이따금씩 바쁘지 않을 때 만나는 친구들과 함께 살거나 살지 않는 가족들이 있지만,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진출하면
내 밥그릇을 찾아먹느라 바쁘다. 거기서 써버린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는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고, 친구나 가족을 만나 해소하기도 한다. 어쨌든 내 일이 바쁘고, 내 커리어를 위해 할 일이 많으면 가족이고 친구고 뭐고 거기에 몰두할 수 밖에 없다. 그정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드니까. 다들 그 정도는 노력하니까.
예를 들면 노량진 고시촌에 들어가 공무원 공부를 하느라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거나 친구들과 연락을 끊게 되는 그런 경우.
직장에선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에 일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투잡러, 쓰리잡러, 주7일과 같이 엄청난 강도의 노동이 놀랍지 않은 사회. 공무원이나 공기업 외에는 정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공무원 조차 연금이 위태롭다. 나이가 들고 연차가 쌓일 수록 내 밥그릇은 채워지지만 4-50대가 되면 새로운 밥그릇을 찾아 떠나야 한다.
30여년간 교사생활을 했던 아빠는 퇴임를 하자마자 쉼없이 약 3년 정도 새로운 일을 하셨다. 그러다 그 일을 관두게 되었고 갑자기 자유가 주어진 아빠는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 지 막막해 하셨고, 또 다른 일을 찾기 위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아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금이 계속 나오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데 이젠 좀 쉬고 싶을 때가 되지 않았나?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 지 고민이 된다는 아빠에게 난 항상 이젠 좀 쉬어도 된다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라고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불안해 하셨다.
내가 스무살이 되던 해 스스로 돈을 벌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여러가지 알바도 하고 교내외활동도 하며 바쁘게 살아왔다. 학교를 오래 다니긴 했지만 일은 계속 병행해왔던 것 같다. 캐나다에 오고 직장인이 되면서 여기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보니, 한국과는 너무 달랐다.
직급과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확실히 일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가족" 그리고 "휴식"이다. 일을 하다가도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던 일 다 접어두고 집에 가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 메디컬 리브를 통해 회사에서 짤리지 않고 충분한 휴식시간을 가진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요즘은 회사에서 슬로우한 시즌인데 일이 없으니 월급루팡의 날이 지속되고, 나름대로 바빠보이는 동료들을 보면서 불안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뭔가 일을 계속 하고 싶고 바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든다. 매니저나 시니어에게 일이 없다고 일을 달라고 하면 일이 없다며 이 시기를 즐기라고 하는데, 좋다가도 뭔지 모를 불안감이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하다가 승진을 못할 것 같고, 매니저에게 인정을 못받을 것 같은 불안감. 아무래도 한국에서부터 이어져 온 일을 꾸준히 해야한다는 강박, 그런 강박을 가진 부모님을 보며 살아온 것이 원인일까.
한국에선 끊임없이 평가를 받으며,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오기도 했다. 한국에선 윗사람이 나를 성과를 인정해주고, 평가하므로 윗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선 스스로 나 자신을 평가하고, 윗사람이 그걸 리뷰하는 식이니, 눈치를 볼 필요가 크게 없어졌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를 더 많이 보는 것 같다. 여기서 내가 가장 많이 받았던 피드백은 주니어때는 너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으니 실수해도 괜찮다.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좀 더 나 자신을 칭찬하고 덜 겸손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요즘도 문득 떠오르는 오랜 기억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중간, 기말고사, 수행평가가 끝나면 선생님이 반 전체 명단과 반 석차, 전교 석차가 적혀 있는 종이를 뒤에 붙여놓았었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결과를 확인하며 성적이 내려가면 좌절하고, 오르면 뿌듯해하던, 나 자신을 점수로 평가하던 시절. 대학교를 가니 교수님께 잘 보여야 했고, 대학원에 가니 담당교수님께 굽신거리며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눈치봐야 했던 시절. 직장인일 땐 학연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의 텃세에, 일을 알려주지도 않고 느리다고 구박하고, 신입을 야근시키면서 자기들끼리만 치킨을 시켜먹고, 어느 노처녀 과장인지 부장인지 모를 사람에게 인사를 안했다고 찍혀서 고통받다 짤린 동기를 보며 충격받았던,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엄청 눈치를 봐야했던 시절. 중소기업도 아니고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서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난 앞으로 사기업에 가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지금은 돌고 돌아 캐나다의 사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캐나다의 첫 직장과도 결이 맞지 않았긴 하다.) 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매니저와 편하게 인간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가족을 돌봐야 할 때 달려갈 수 있고, 내가 맡은 몫만 잘 해내면 된다. 초반에는 나에 대한 무관심이 불안하고, 매니저의 피드백에 엄청 신경쓰고 눈치도 많이 봤지만 요즘은 그 불안감을 무시하고 점점 나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쉽지는 않다. 결국 나의 목표를 지지해줄 수 있고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결이 맞는 회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유튜브를 보다가 듣게된 법륜스님의 한 말씀이 크게 와닿았다.
"제일 도인에 근접하는 게 농민들입니다. 저 산 위에 밭에 가서 혼자(일해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내가 뭐 하는지 그냥 토끼 한 마리 뛰어다니듯이 내가 하루 종일 농사를 지어도 힘들었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그냥 산에 가서 일하고 내려와서 밥해 먹고 또 아침에 올라가서 일하고. 그러니까 꼭 경전을 안 배워도 그런 속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또 양심적으로 이렇게 살아가게 된다.
근데 행자는 그보다 좀 더 어려워요. 절에 사는 대중의 밑에서 잔소리 들어가며 밥 차려줘가며 욕 얻어먹어가며 그럼 대부분 3년 안에 도망을 가버립니다. 이런 게 뭐 도가 얻기 어렵다는 게 아니라 결국은 자기 마음의 번뇌, 자기 마음에 이 저항을 자기가 어떻게 알아차리고 극복하느냐 이게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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